[스크랩] 외동읍 사투리에 ‘나이롱 다비’에 얽힌 사연들
외동읍 사투리에 ‘나이롱 다비’에 얽힌 사연들
옛적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外東邑)에서는 ‘다비’ 또는 ‘나이롱 다비’라는 말이 있었다. 표준어로 ‘양말’ 또는 ‘나일론(nylon) 양말’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거의 모든 이들이 ‘다비’를 경상도(慶尙道)사투리로 알고 있는데, ‘다비’는 경상도사투리도 우리말도 아닌 일본말이라는 점을 유의하여야 한다.
일본어 한자로 ‘족대(足袋)’라는 뜻의 ‘다비(たび)’는 흔히 일본식 버선이라고도 하는데, 이 ‘다비’가 우리나라에 전해지면서 처음 상륙한 경상도(慶尙道) 지역의 사투리로 인식하게 되었고, 경상도사람들도 그 것이 마치 자기들 말이라도 되는 양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일본버선 ‘다비’
그래서 일본말은 거의가 부산(釜山)을 비롯한 경상도 동남부(東南部) 지방부터 전해졌기 때문에 다른 지방 사람들은 그 것을 모두 경상도 말로 오인(誤認)하곤 했었다. 때문에 현재 경상도 동남부지방 사투리라고 알고 있는 말 중 어느 정도 생소(生素)한 용어는 거의가 일본어(日本語)라고 보면 된다.
일본인(日本人)들은 우리가 저들의 ‘다비’를 신고 있을 때 ‘다비’의 천을 고무로 개량한 ‘지까다비(じかたび)’를 만들기도 했었다. ‘지까다비’는 ‘다비’와 마찬가지로 엄지발가락과 다른 발가락이 갈라진 모양으로 발전체를 감싸기 때문에 발의 치수가 조금만 틀려도 들어가지 않는 문제점이 있었다.
‘지까다비(じかたび)’는 고무로 바닥의 창을 만들고, 질긴 천으로 만든 양말 같은 신발이다. 때문에 이를 ‘고무다비’, ‘맨발다비’라고도 했었다. 공사장 인부, 농부, 노동자 등이 주로 신었고, 징용으로 잡혀간 우리 청년들의 군화(軍靴)로 사용되기도 했었다. 해방 후까지도 친일분자(親日分子) 출신인사들이 일제 ‘지까다비’를 신고 으스대며 다니기도 했었다.
6.25 때는 ‘빨치산’들이 마을에 내려와 주민들에게 오일장(五日場)에서 파는 ‘지까다비’를 사다 달라고 조르기도 했었고, 어쩔 수 없이 사다 준 주민들도 상당수 있었다. 거절할 경우 후환(後患)이 두렵기도 했었고, 일정부분 그들에 대한 인간적인 동정심(同情心)도 작용했던 것으로 보였다.
각설하고 ‘다비(たび)’ 얘기를 계속한다. 필자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1950년대 초기까지는 ‘다비’가 너무 귀해 서민들은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꽤 괜찮은 사람들이라야 겨우 ‘면 다비’, 즉 면양말(綿洋襪)을 신을 수 있었다. 때문에 서민 자녀들의 경우 언제나 맨발이었고, 엄동설한(嚴冬雪寒)이나 되면 겨우 ‘까치버선’을 얻어 신을 정도였다.
지금의 양말
그 당시의 양말은 구경자체가 힘들기도 했지만, 6․25이후 도처에 양말공장(洋襪工場)이 들어서면서부터는 서민가정에서도 하나 둘 양말을 신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면양말은 신축성(伸縮性)이 거의 없어 세탁 후에 끙끙대며 신느라고 애를 먹기도 했었다.
뿐만 아니라 양말의 뒤축과 발가락 끝이 쉬 구멍이 나서 밤마다 어머니들이 침침한 호롱불 아래서 양말 꿰매는 일이 일과(日課)가 되기도 했었고, 때문에 당시에는 한다하는 신사(紳士)들도 구멍이 나서 꿰맨 양말을 신고 다니는 것은 보통이었다. 구멍 난 양말을 그냥 신고 다니는 경우도 있었다.
세계은행 총제의 구멍난 양말
필자의 경우 정확하게 언제부터 양말을 신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초등학교(初等學校) 1학년 겨울철부터 밤마다 호롱불 아래서 필자들이 꿰어 주던 바늘실로 양말을 기우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아스라이 떠오른다.
해마다 명절(名節)이면 얻어 신던 양말을 깁고 또 그 위에 덧대면, 양말은 한 켤레만 신어도 두꺼워져서 발이 덜 시리기도 했었다. 학교에 가면 양말을 깁지도 않고 구멍이 뚫린 채로 신고 다니는 아이들이 있는가하면, 여러 차례 깁고 또 기워 한번 기운 자리와 두 번 기운자리가 선명하게 나타나는 고물 양말을 신고 다니기도 했었다.
구멍 난 양말
필자의 경우는 비교적(比較的) 바느질솜씨가 뛰어나신 어머니 덕택(德澤)에 편안하게 기운 걸 신고 다녔다. 양말바닥을 여러 번 기워서도 안 되면, 나중에는 그 양말을 버리고, 목다리를 잘라 두었다가 다른 양말을 깁는데 재료(材料)로 쓰거나, 학교에서 가을운동회 숙제(宿題)로 내주는 ‘오자미’를 만들어 가기도 했었다.
털 양말목으로 만든 ‘오자미’
시골마을에 전기(電氣)가 공급되고 부터는 새로운 양말 깁기 방식이 개발되기도 했다. ‘전기다마’에 양말을 꿰어 깁는 방식이었다. 종전(從前)까지는 양말이 약간 헤졌거나 찢어진 경우 양말을 뒤집어 헤진 양쪽 부위(部位)를 끌어당겨 꿰매면 그만큼 양말의 폭(幅)이 좁아져 더 쉽게 새로운 구멍이 나기도 했고, 보기도 흉했다.
그러나 30촉짜리 전구(電球)를 구멍 난 양말 안에 밀어 넣고, 찢어진 부위 양쪽을 바늘실로 촘촘하게 끌어당겨 꿰매면, 원래 모양과 비슷하게 복원(復元)되기도 했고, 양말 폭이 그대로 유지(維持)되어 쉬이 구멍이 나지 않는 이점(利點)이 있기도 했다.
'전기다마'로 양말 깁기
천연색(天然色) 컬러에 바이오기능까지 첨가한 첨단양말에 실밥 한 두 개가 터졌다고 새 양말을 찾는 지금의 세태(世態)를 보면서 어린 시절 명절 때 얻어 신은 단벌 양말을 덕지덕지 덧기워 신던 추억(追憶)을 얘기한다는 것이 어쩐지 서글퍼지기도 한다.
‘나이롱 다비’ 얘기로 돌아간다. 면양말도 제대로 얻어 신지 못했던 전쟁기간이 지나고, 1954년 태창방직(泰昌紡織)이 ‘나일론(nylon)’을 생산하면서부터는 ‘나일론 양말’이 전국을 휩쓸기 시작했다.
세탁을 하면 졸아들 대로 졸아드는 당시의 면양말에 비해 양말 속으로 발이 단번에 쑥 들어갔으며, 주부(主婦)들은 양말 꿰매기에서 단번에 해방되었다고 탄성을 지르기도 했다.
여기에다 ‘나일론’이 하도 좋아 ‘나일론 팬티’까지 등장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좋던 ‘나일론’ 제품에 문제가 생겼다. 양말의 경우 발에 베인 땀이 배출(排出)되지 않아 무좀이 기승을 부렸고, ‘나일론 팬티’를 입으면 불임(不姙)이 된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지금은 탄력 있고 위생적(衛生的)인 면양말로 다시 돌아 왔지만, 당시의 ‘나이롱 다비’는 내구성(耐久性)만 좋았을 뿐 건강과는 거리가 먼 양말이었다.
‘다비’의 역사를 알아본다. 향우님들께서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양말이라 하면, 방한(防寒)을 위해 또는 예의로 발에 신는 서양식 버선을 말한다.
인류 초기의 양말은 마른 풀이나 머리털, 양털을 신속에 넣는 것으로 대용했는데, 이러한 사실은 북극권(北極圈)에 살고 있는 ‘랩’족이나 ‘스칸디나비아’ 지방의 발굴품(發掘品)에 나타나고 있다.
이후부터는 모피(毛皮)를 발에 둘둘 감아 양말을 대신하기도 했다. 이것이 실로 짠 양말로 바뀐 것은 16세기 중반부터 영국(英國)에서였고, 이후 목이 긴 양말은 ‘스타킹’이라는 호칭으로 바뀌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예전부터 버선을 신었는데, 이것을 한자로 말(襪)이라 썼으며, 두 겹의 헝겊으로 만들어 그 안에 솜을 넣어 신기도 했다. 개화기 이후 양말이 전해지자 ‘서양식 버선’이란 뜻에서 이를 양말이라 불렀다.
또한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을 계기로 정부가 서양문명을 받아들여 복제(服制)를 개혁하면서부터는 대다수 관리들과 선비들이 양복을 입게 되자 버선도 자연히 양말로 대체되었다.
버선(타래버선)
8·15광복 후 한복(韓服)은 노년층이나 일부 농촌지역의 복장으로 후퇴하고, 양복이 일상생활에 파고들어 현대 한국인(韓國人)의 복장으로서 확고한 자리를 굳힌 것이다.
양말의 재료는 천·피혁·니트·메리야스 등이 있으나, 오늘날 사용되는 것은 ‘니트’와 ‘메리야스’가 대부분이다. 발 모양에 맞추어 제작되는데 목이 긴 것과 목이 짧은 것 등이 있다.
최근에는 발이 들어가는 부분만 있고, 목이 없는 커버 형태의 양말이 여름용으로 인기를 누리기도 한다.
나이롱 다비
‘나이롱다비’에는 또 다른 간과할 수 없는 문제점이 있었다. 화기(火氣)가 닿으면 쉬 불에 타버린다는 점이다. 지난 1950년대 중반 겨울철이 되어 앞뒤 들판 ‘고래논’에 얼음이 얼면, 필자들은 판자로 만든 ‘수겟또’나 ‘선수겟또’, ‘발수겟또’를 꺼내들고 개울가 얼음지치기에 나섰다가 얼음장이 푹 꺼지면 아랫도리가 통째로 물에 젖어버린다.
이때가 문제였다. 아무리 천둥벌거숭이지만 한겨울에 신발과 나이롱 양말이 몽땅 젖었으니 그 살이 얼마나 아렸겠는가. 짓까불다 못 견딜 만하면 ‘검불’을 긁어모아 지핀 불가에 서캐처럼 들러붙어 양말을 말리곤 했었다.
물 젖은 양말을 말리던 검불 불
그런데 ‘나이롱 양말’이라는 게 참 허망해 ‘휙’하고 불꽃만 스쳐도 오그라들고 눌어붙어 구멍이 숭숭 뚫려 버린다. ‘씻고 벗고’ 양말은 그것 한 켤레뿐인데 그걸 ‘절딴’내 놨으니 눈앞이 캄캄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서 잠시 어린 시절 ‘나이롱 다비’를 태워먹은 추억 한 구절을 음미하고 넘어간다.
햇볕에 녹아 얼음판이 질척거릴 무렵, 코를 빼물고 사립문을 들어서면 어머니께서는 낌새로 ‘사달’을 짐작하신다. “뜨신 바에(따뜻한 방에) 주는 밥이나 묵고(먹고) 바악숙쩨(방학숙제)나 할끼제, 무신(무슨) 용 신다꼬(용을 쓴다고) 얼도(얼지도) 아는(않는) 물꾸디(물구덩이)에 디갔드노(들어갔더냐) 그래”라며 꾸지람을 하신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꾸지람을 듣고 나면 오금이 저리기는 했지만, 그게 면죄부(免罪符)가 되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대신 그 날은 종일 방안에서 뭉기적거려야 된다.
저물 녘, 어머니는 광목천을 덧대 기운 그 양말을 건네주시면서 “또 불 옆에 갔단 봐라”는 엄포를 따뜻한 눈총에 얹어 보내시기도 하셨다.
기운 양말
필자가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겨울이지만 맨발 벗고 학교에 다니는 애들이 무엇을 신고 다니는 애들보다 더 많았다. 양말은 설이나 추석이 되어야 한 켤레 얻어 신을 수 있을 때였다.
‘양말(洋襪)’이란 ‘서양양(洋)’자와 ‘버선말(襪)’자로 된 합성어다. 양재기(洋瓷器), 양동이, 양배추, 양말의 ‘양(洋)’은 모두 서양을 지칭하는 말이다. 결론적으로 양말은 서양인의 버선이란 뜻이다.
‘버선’의 이력을 알아보자. 최세진이 쓴 훈몽자회(訓蒙字會)에 보면 ‘보션’이란 말이 있는데, 이를 근거로 하면, ‘버선’은 그 이전부터 생겨난 것으로 추정된다. 혹자는 고려시대부터 신었다 하기도 하고, 문헌상에 나타나는 ‘족의(足衣)’ 또는 ‘족건(足件)’이 버선이라고도 한다.
버선과 구조
필자가 군대 생활 할 때는 1년에 몇 개 지급되는 면양말이 있었는데, 품질이 별로여서 며칠만 신으면 발뒤꿈치에 ‘빵꾸’가 났다.
그대로 신으면 발바닥이 시려 발뒤꿈치 부분이 발등으로 오도록 신었는데, 이 경우 상대적으로 약하게 직조(織造)된 발등 부분은 하루만에 ‘빵꾸’가 나기도 했었다. 군대에서 보급되는 양말을 특히 ‘군말(軍襪)’이라고도 했다.
군말(軍襪)
1970년대 중반까지는 서민들의 경우 양말 값도 여간 부담(負擔)이 되지 않았다. 당시 ‘나일론 양말’ 한 켤레 값이 좀 싼 것은 70원정도, 좀 비싼 것은 100원 정도 했었다.
당시의 라면 1개 값이 20원, 쌀 한 되(약 2킬로) 값이 200원 정도, 시내버스 요금이 20원, 택시 기본요금(基本料金)이 90원 할 때 이니 짐작이 갈 것이다. 글이 또 길어질 것 같아 권오범의 ‘나일론 양말’을 음미하면서 파일을 접는다.
1950년대까지는 날씨가 너무나 추웠기 때문에 사정이 되는 가정의 자녀들은 겨울에 양말을 두 켤레씩 껴 신고 다니기도 했다. 송아지 콧김보다 못한 생솔가지 난로(煖爐)에 얼음장 같은 마룻바닥에서 하루 종일 수업을 받으려면 발이 너무 시렸기 때문이다.
안에 신은 양말은 다음날 바깥에 신고, 밖에 신은 짝은 이튿날 속에 신는 식으로 매일 한 켤레씩 바꿔 신었다. 이렇게 하면 발이 좀 덜 시리기도 했고, 양말이 쉬 떨어지지 않는 장점이 있기도 했다. 다시 ‘소운’의 ‘유년의 겨울 삽화’를 음미하면서 그 시절을 되짚어 본다.
이하에서는 ‘나이롱 다비’의 재료 ‘나일론(nylon)’이 태어난 경위를 알아본다. 20세기 ‘기적의 섬유’ 나일론, ‘거미줄보다 가늘고 강철(鋼鐵)보다 질기다’는 ‘나일론’은 아주 우연한 계기(契機)로 세상에 태어났다.
미국(美國) ‘듀폰’사의 연구실 책임자로 있던 ‘월리스 캐러더스’는 ‘나일론(nylon)’을 어렵게 합성(合成)했지만, 이 물질을 어디에 어떻게 써야 할지를 알지 못했다.
그런데 이때 ‘캐러더스’가 실험실을 비운 사이 그의 조수(助手)가 유리막대로 시험관(試驗管)에 달라붙은 ‘나일론’ 찌꺼기를 긁어내다 깜짝 놀랐다. 그 유리막대 끝에서 실크처럼 영롱하고 가느다란 실이 끝없이 이어져 나왔기 때문이다.
1929년 ‘듀폰’이 ‘나일론(nylon)’ 개발을 위해 2700만 달러를 쏟아 부을 당시 미국 경제는 대공황(大恐慌)으로 잔뜩 움츠러들어 있었다.
그러나 ‘듀폰’은 “불황을 이기는 유일한 길은 기초연구와 신제품 개발에 있다”며, 과감한 투자에 나섰다. 이로부터 10년 후인 1939년 10월 24일, 마침내 미국에서 ‘나일론 양말’이 시판된다.
미국에서 개발된 ‘나일론’이 우리나라에 선보인 것은 6․25전란 중인 1953년, 일본에서 ‘나일론’을 수입한 ‘삼경물산’은 “깁지 않은 양말을 신고 다니는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며 “주부들이 바느질에서 해방됐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당시 ‘나일론 양말’의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재래종(在來種) 참외를 개량한 노랑참외가 ‘나이롱 참외’로 불렸고, 화투놀이에도 ‘나이롱 뻥’이 생겨났다.
그러나 ‘나일론’은 ‘폴리에스테르’에 밀려나면서 ‘나이롱환자’ ‘나이롱 대학생’ ‘나이롱 처녀’ 같은 유행어(流行語)가 말해주듯 ‘가짜’나 ‘싸구려’의 대명사로 전락(轉落)하고 말았다.
‘나일론(nylon)’의 ‘나일(nyle)’은 니힐(nihil : 허무)에서 유래한다. 이 말은 발명자인 ‘캐러더스’의 비관적인 인생관(人生觀)을 빗댔다고도 했는데, 불에 닿으면 그 화려하고 빛나는 때깔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마는 허무한 속성(屬性)을 나타내는 것 같아서였다.
‘캐러더스’는 1937년 필라델피아의 한 호텔에서 우울증으로 자살(自殺)했다. 20세기 최고의 발명품으로 꼽히는 인조고무와 ‘나일론(nylon)’을 거푸 개발했던 ‘캐러더스’. 그의 자살은 ‘제우스’의 불을 훔쳐 인간에게 준 죄로 지독한 형벌을 받아야 했던 현대판 ‘프로메테우스의 저주’라 할 만했었다.
여기에서 위에서 말한 ‘나이롱 참외’ 얘기를 좀 더 알아보기로 한다. ‘나이롱 참외’란 1960년대 등장한 개량종(改良種) 참외의 품종을 뜻하는 말인데, 왜 뜬금없이 참외에 ‘나이롱’이라는 이름이 붙었는가 하는 것이 의문이 된다.
연유를 알아본다. 지금이야 ‘나이롱환자’니, ‘나이롱 처녀’니 하는 식으로 안 좋은 의미로 사용되는 ‘나이롱’이지만, 앞서 말한 대로 1960년대만 하더라도 질기고 가볍고 튼튼한 ‘나이롱’은 꿈의 섬유(纖維)였고, ‘나이롱 양말’ 하나 구하는 것이 소원(所願)인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왜 ‘나일론’이 참외 이름이 되었을까. 이 역시 우연 같은 것이었다. 우리나라에 ‘나일론’이 처음 들어와 공전(空前)의 히트를 치고 있을 때, 전국적으로 개량종 참외인 ‘은천참외’가 보급되었다.
그리고 달고 아삭아삭한 그 참외의 맛에 반해 버린 사람들은 그냥 ‘은천참외’라는 이름으로 만족할 수가 없었다.
나이롱 참외(은천참외)
이 정도 맛이라면 그 당시 히트를 치던 ‘나이롱’보다 못할게 뭐 있느냐는 뜻에서 그 참외에 ‘나이롱’이라는 말을 붙여 주게 되었고, 이 말이 전국(全國)에 퍼져 달고 아삭아삭한 참외는 모두 ‘나이롱 참외’가 된 것이다.
지금이야 열(熱)만 받으면 눌어붙는 탓에 덧없는 싸구려의 대명사(代名詞)가 되어버린 ‘나일론’이지만, 그래도 한때 최첨단(最尖端)의 대명사로 명명되었던 시절도 있었던 것이다.
겨울방학 때마다 ‘나이롱 양말’ 태워먹던 우리들의 어린 시절을 노래한 박현숙의 ‘겨울방학의 추억’을 음미하면서 파일을 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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