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년 중 폰문자를 제일 많이 받던 날이 있었다. 축하메세지에 답글 쓰느라 손가락이 아플지경이었다. 그 날이 내 귀빠진 날이라나.......? 해가 서천을 넘어갈 무렵이었다. 가까이 있는 친구하나 찾아와서 함께 맥주 한 잔으로 호젓하게 귀 빠진 해저녁을즐기고 있는데 "띵 동~~!" 느닷없는 벨이 울렸다. 누굴까? 정말 이 저녁에 나를 찾아 줄 사람 아무도 없는데... 나는 인터폰을 열어보고, 동시에 "어머나! 거의 괴성을 지르면 용수철처럼 튕겨나가서 문을 열었다. 온 몸을 가릴정도로 커다란 화분 하나가 주황색 레이스로 치장을 하고 서서 "생일 축하합니다" 한다. 얼른 받아든 화분은 값비싸고 화려한 고급꽃이 아닌 변두리 담벼락 밑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분꽃'이었다. 황토색 질화분에 분꽃을 심고 주황색 레이스로 곱게 감싸고 분홍 리본띠를 둘렀다. 그리곤 그 먼 곳에서 버스를 갈아타면서 그 무거운 화분을 가슴에 안고 찾아 온 이는 내가 정말 정말 사랑하는 친구 그 이름마져도 이뿐 '분이'씨였다. 내가 워낙 꽃기르기를 좋아해서 우리 베란다에도 분꽃이나 봉숭아꽃 한 그루 없을 리야 없지만, 그것도 우리집에 없는 노란 분꽃이어서 더 없이 반가웠다. 얼마나 고맙고 예쁜지 단지 '고맙다'는 표현만으로 내 마음 전달 하기에는 너무 부족했다. 물론 먼저 온 친구가 내 맘에 쏙 드는 악세사리를 사가지고 와서 마음이 들 떠 있는 중이었기에 더없이 행복했다. 선물보다도 내 좋은 친구들과 함께 우리집에서 만나는 것 만으로도 내 기분은 잔뜩 들떠버렸다.
사실 말이 친구지 이 친구들은 나 보다 7~8세나 연하 아우들이다. 다들 직장 관계로 바쁜 틈에도 짬짬이 만난다. 한 참 못 보면 '보고 싶다고, 보고싶어 죽겠다'고 만나고, 눈이 온다고 만나고, 비가 억수로 쏟아진다고 만나고, 이슬비에 옷좀 적셔보자고 만나고, 햇살이 너무 좋다고 만나고, 어디에 무슨 꽃이 피었더라고 만나고, 갈대 보러가자, 단풍 보러가자, 코스모스 꽃길에 가자...새 옷 샀다고 만나고, 퍼머새로 했다고 만나고, 아이가 장학금 탔다고 만나고....함박눈 펑펑 날리는 날에 그냥 넘길 수없다며 무릎 푹푹 빠지며 깔깔대며 산에 오르고, 보리밥, 칼국수 혹은 그럴듯한 변두리 카페에 가서 향이 좋은 차나 맥주한 잔, 가까운 산에 올라 땀 흘리고, 공원을 산책하면서 수다떨고 깔깔대고, 백화점 세일장을 뒤적거리면서 싸고 좋은(?) 옷을 고르기도 하고, 혹은 노래방에 가서 맘껏 풍류의 멋도 즐길 줄 아는...그러나 살림 또한 맛깔스럽게 깔끔하게 잘하는 현모양처들이다. 오이지가 맛들었다고 나누어 주고, 쑥을 직접 뜯어 쑥개떡을 쪘다고 나누어 주고...자주 못 만나면 못 만나는 대로 핑계야 만들면 되었으니, 어디 남자들 술마시는 핑계에 비할까? 아니 어느 애인이 있어 이 만큼 행복할까?
'잘 생긴 여자보다는 이뿐 여자, 이뿐 여자보다는 귀여운 여자를 택하라" 라는 말이 있다. 내가 가끔 젊은 청년들에게 곧 잘 입버릇처럼 해주는 말이다. 잘 생긴 여자는 빨리 실증이 나고, 귀여운 여자는 오래 보아도 실증나지 안는다던가? 분이씨가 바로 그런 여자다. 얼굴이 귀여운 여자 치고 맘씨 나쁜 여자는 거의 없다. 본인은 얼굴이 너무 크다고 불만(?)인 분이씨는 그렇게 미인은 아니지만, 웃는 얼굴이 독특하게 너무나 귀엽고 이뿐 여자다. 평소 누구에게 이 친구를 소개 할 때면 '어느 것 하나 버릴 게 없는 여자'라고 말하기를 나는 아까워하지 않는다. 분이씨는 마음만큼이나 이름도 이뿐 <달>이라는 닉네임을 가졌다. 순한 달처럼 환하게 웃는 얼굴과 하는 짓 모두가 그녀 목소리만큼이나 예뻐서 누구에게나 사랑 받는 여자 분이씨...
어느 해던가? 우리 친정엄마가 노환을 앓고 계셨는데. 거의 미음도 못 넘기신다는 내 전화를 받고 글쎄 호박죽을 아주 묽고 맛있게 끓여가지고 수건으로 싸고 싸가지고 차도 없이 버스로 한 시간이나 걸리는 우리집까지 와서 따끈한 호박죽을 엄마에게 먹여드렸다. 이상하게도 그 날 울엄마는 한 이틀 그 호박죽만을 목에 넘기셨고, 그로부터 생기를 되찾아 죽을 드시다가 몇달 후 결국 돌아가셨지만, 그 때 일을 생각하면 나는 십 여년이 다 된 지금까지도 가슴이 한없이 따뜻해온다. 말은 안해도 분이씨만 보면 그 때일이 생각나곤 한다. 그런데 이 번 내 생일 날, 또 한 번 내 가슴 속에서 뜨끈한 눈물이 솟게 하는 아주 미운(?) 여자다.
우리 큰아들녀석이 대학생 때였었던가? 어느 날 벽에 걸린 카렌다를 들춰보더니 웬 동그라미가 그렇게 많이 그려져 있느냐고 내게 물었다. 우리 가족 친척들의 생일이라고 말해줬더니 이 무뚝뚝한녀석 하는 말 " 생일이 무슨 의미가 그리 대단하냐?" 고...에구~! 그 밥에 그 나물이라더니...나는 "굳이 어떤 의미를 찾기보다 사람이 덤덤하게 살아가는 것보다 깨소금 참기름 고추가루 마늘 등의 양념을 간간이 넣으면 메마른 삶이 훨씬 맛이 날 것 아니냐?"고 말을 해준 적이 있었다. 사실 어린 아기의 '탠생'이야 충분히 축하 해줘야 하겠지만, 나이든 사람들의 생일을 축하해 주는 것은 요즘의 장수시대에는 좀 이해 안가는 부분도 없지 않다. 나이 먹는 것이 무슨 자랑이라고....
그러나 좋은 사람들이 뜬금없이 나를 기억해주고, 찾아와 주고, 문자를 날려주고, 축하를 받는다는 것은 솔직히 말해서 기분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핑계로 해서 평소 가까운 사람들이 함께 모여 웃고 담소하고 그러면서 생의 한 부분에 맛깔스러운 양념을 치며, 사는 맛을 돋우는 것도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나도 가까운 이들의 생일을 많이 기억하도록 노력할 것을 다짐해본다, 또 그로 인해 서로의 우정도 더 도타워지고....암튼 생일은 좋은 날...죽는 것보다 탄생이 훨씬 기분좋고 위대한 날인 건 틀림이 없다.
어제는 전화가 왔다. "우리 시집 간 이뿐 딸 잘 살고 있느냐?" 고... " 지금도 노란 분꽃이 우리 집안을 분이씨처럼 환한 웃음으로 가득 채워준다" 고 대답해주었다.
어느새 입추의 바람결이 느껴진다. 이 번 주말엔 코스모스꽃 보러가자고 전화해야지...<고운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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