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의 원심력을 탐구하는 변주곡들
- 권갑하 시세계
김 병 희(문학박사)
1.
시조가 명실공히 정형시임에도 불구하고 시인의 개성에 따라 그 모양도 느낌도 천차만별인 다른 작품이 탄생한다는 사실에 신기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감정이란 도대체 어떻게 생겼기에 사물마다에서 개개인별로 다른 언어가 튀어나오는 것일까. 언어는 자의성을 가지고 있다고 학창시절부터 누누이 들어왔다. 소리와 의미를 결합시킨 약속일진대 사용자에 따라 어찌 그리 감정의 포용 정도가 다르고 뉘앙스에 차이가 나는 것인지 골똘히 생각하게 된다. 우리 모두가 언어 사용에 관한 한 잠재력과 창의력을 품어 갖고 있는 것일까, 아니 적어도 시인들의 경우는 그렇다고 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매우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으로 치부해 버리곤 하던 물상이 작품을 통해 오롯이 예술적 자취를 드러낼 때, 그것이 세계에 대한 치열한 통찰의 결과인지 절제와 고양을 통해 탄력을 받는 언어의 힘인지 의아해지곤 한다. 아마도 두 요소가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킨 결과이리라.
권갑하 시인의 <종>을 읽으면서 문득 언어가 사물의 존재를 지나치게 격상시키곤 한다는 생각에 이끌려 들었다. 내가 익히 아는 물건 같은데, 어디서 봤더라...... 그 실체를 본 것이 언제, 어디서였던가 곰곰이 짚어가다 보니 실은 기억의 마당 어느 곳에도 실체로서의 종은 보관되어 있지 않았다. 다만 무미건조한 인식의 마당 저편에 구체적 존재로서가 아닌 이미지로서 각인되어 있었다. 특별한 사적지에나 가지 않은 다음에야 종을 구경하기도 힘든 게 요즘의 형편이다. 그 쓸모 또한 시대의 뒤안길로 망연히 사라진 지 오래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실컷 한번 울려나 봤다면, 아니 만져라도 봤다면 기억할 수 있을까? “학교 종이 땡땡땡......” 하는 노래를 배우고 자랐으나 그 종도 본 적 없음에야 친근하게 기억할 만한 의미의 토대를 갖지 못한 것이 내 탓만은 아닐 터이다. 그런데도 마치 잘 알고 있는 일상적인 사물처럼 느껴져 지고 시어가 빚어내는 감성에 새삼스러움을 느끼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종이라면 그래도 에밀레종이나 보신각 종 정도를 떠올리며 숭고함을 되새기곤 하던 메마른 가슴에 권갑하 시인의 <종> 맑고 긴 여운으로 다가온다.
제 몸을 때려 고운 무늬로 퍼져나가기까지는
울려 퍼져 그대 잠든 사랑을 깨우기까지는
신열의 고통이 있다,
밤을 하얗게 태우는.
더 멀리 더 가까이 그대에게 가 닿기 위해
스미어 뼈 살 다 녹이는 맑고 긴 여운을 위해
입 속의 말을 버린다,
가슴 터엉 비운다.
<종> 전문
“몸을 때려” 비명도 아우성도 아닌 그저 긴 여운을 만들어내려는 존재가 종이라는 표현에 사뭇 숙연해진다. 입 속의 말을 버리고 가슴을 텅 비운다는 종장의 시구가 가슴 속을 아련하게 만든다. 어느 시대나 어려움이 있었고 누구에게나 삶의 시련이 따르게 마련이다. 돌아보면 모두가 고난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려 애쓰면서 지금의 그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모두가 살기 힘들다고, 우리 시대야말로 최악의 시기라고 넋두리 하며 세월을 이겨내고 있다. 고도로 전문화된 인간을 지향하는 오늘날의 세태 속에서 자꾸만 뒤쳐져 가는 발걸음에 밭은 숨을 몰아쉴 때, 미련하게 온 몸을 때려 고운 무늬의 여운을 띄워 보내주는 종소리의 미학을 떠올린다면 조바심치는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지 않을까. 얄팍한 입술의 미사여구도 다 포기하고 덩치만 큰 껍데기가 되어 가슴을 텅 비운다면 그 기운이 미치는 어디까지라도 선하고 자유롭지 않은 곳이 없을 터이다.
언어를 버무려 이미지를 만들고 그 이미지가 의미심장한 존재가 되어 되살아나게 하는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시인이라면, 권갑하 시인의 작품에는 버무린 시어들을 정치하게 배열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표현의 묘미를 가일층 고조시키려는 배려일 것이다. 초장, 중장과 달리 종장을 따로 떼고 두 행으로 나누어 짧은 호흡으로 마무리함으로써 감성과 인식의 차이와 조화를 잘 어우르고 있다. 시행에 대한 권갑하 시인의 이러한 배려는 대부분의 작품에서 발견된다. <숫돌>에서는 시 형식에서 감행하기 어려운 인용의 시구를 실험하고 있다.
아찔한 날 선 삶을 온몸으로 껴안으며
낫을 갈 듯 살아오신 아버님의 팔순 생애
등 굽어 푹 패인 가슴 허연 뼈로 누웠다.
-균형을 잘 잡아야 날이 안 넘는 겨
갈무리 기도인문인양 깃을 치며 솟는 햇살
하늘빛 흥건한 뼛가루 목숨인양 뜨겁다.
가슴 마구 들이치던 내 유년의 마른 바람
-물을 자주 뿌려야 날이 안 상하는 겨
귓전의 촉촉한 말씀 눈물 속에 날이 선다.
<숫돌> 전문
팔순 생애를 날 갈 듯 아찔하게 살아오신 아버님께 건네받은 경구들을 가슴에 새기며 토로하는 회한 앞에 다시금 숙연해지면서도 그 질박한 음성에 긴장이 스러짐을 느낀다. “-균형을 잘 잡아야 날이 안 넘는 겨”, 누구라도 못 알아들을 리 없는 처절한 진리다. 철학자나 사상가의 혜안을 빌리지 않아도, 솜털까지 쭈뼛 세우고 긴장해도 소화하기 힘든 선각자들의 담론에 기대지 않더라도 이 경구의 의미를 여운까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그저 목구멍으로 삼켜 넘기기엔 너무도 뜨거운 진리다. “-물을 자주 뿌려야 날이 안 상하는 겨”, 이 또한 얼마나 눈물겨운 덕담인가. 적당하다는 말이 더러 폄하되기도 하지만 딱 적당하게 중심을 잡고 조절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서럽도록 어려운 주문이다.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귓전을 적시는 목소리가 입체적으로 다가와 한 동안 머뭇거리게 만든다.
2.
권갑하 시인의 작품에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특징은 끝없이 형식의 변화를 이끌어내고자 하는 시인의 열망에 있다. 현대시조가 그 존재의 의의를 걸고 형식의 문제를 고민해 온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정형시로서의 정통성을 염두에 두면서 현대적 감수성을 반영해야 한다는, 서로 수용하기가 만만하지 않은 과제를 끌어안고 안간힘을 써 왔다. 한편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때로는 고개를 갸웃하며 도리질도 하면서, 실험도 하고 모색도 하고 포기도 하다가 용트림도 하면서 그 모습을 지키고 다듬어 온 것이 오늘날 현대시조의 모습이다. <마른 꽃다발>과 <별>은 두 수를 연의 구별 없이 배열하고 있다. 특히 <괄호 속의 하루>나 <오존주의보 내리는 날>과는 대조적으로 행간에 여유를 두어 시상과 정서의 흐름에 따라 행과 연의 배열까지 고려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인의 형식에 대한 모색이 돋보인다. 급박한 현실의
위기를 읊어내는 작품에서는 행간과 시어의 배열을 조밀하게 함으로써 시각적인 이미지를 상승시키는 효과를 이끌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 여름 푸른 핏물 눈물마저 다 동나고
밟으면 슬픔이 될 흰 뼈대 싸늘한 허울
목소리 다 거둔 빈 방 화석처럼 걸려있다.
진홍의 하루는 가고 미친 듯 다가선 새벽
저것 봐 죄라도 진 듯 마구 뒹구는 꽃 잎
또 하루 견딘다는 건 주검처럼 참혹하다.
<마른 꽃다발> 전문
<마른 꽃다발>에서 시인은 조심스럽게 천천히 참혹함을 이야기 한다. 드라이플라워라고 하면 훨씬 낭만적일까? 마른 꽃다발이란 군더더기 하나 없이 최소한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아슬아슬한 마지막 모습과도 같다. 수분은 모두 말라 버려 의식의 편린 같은 건 한 점도 남아 있지 않은 바삭거리는 존재를 한 장 한 장 짚어나가며 시인 역시 살금살금 숨을 고르고 있다. 무심한 콧바람이나 인기척에도 그만 부서져 내릴 듯한 허울 앞에서 가만가만 호흡을 늦추고 있는 것이다. 혹자는 즐겨 꽃가지를 말리기도 하지만 색과 물이 빠져나간 자취를 시인은 “화석”, “주검”으로 표현하고 있다. “-물을 자주 뿌려야 날이 안 상하는 겨”라는 경구를 다시 한번 떠올리게 되는 지점이다. 봄 내 건조주의보에 시달리다 수차례 산불을 목격하고 난 뒤라 더욱 그러한가, 물기 한 방울 머금지 않은 마른 꽃다발이 초초하기만 하다. <별>도 역시 같은 행 배열을 보이는 작품인데, 그러면서도 한결 느긋하다.
낯 모르는 사내에게 술잔을 건네 놓고
라면 박스를 깔고 벌레처럼 눈을 감는다
때묻은 지난 날 명함 두 손에 꼬옥 쥔 채.
어둠을 견디느라 몸 흠뻑 젖은 풀잎들
꿈결 속 새 한 마리 묵음 (黙音)으로 날아가고
찬이슬 내린 잔 위엔 별이 총총 떨고 있다.
<별> 전문
시조에서 별이나 달은 풍류를 더해주는 단골 제재로 여겨져 왔다. 그런데 권갑하 시인의 작품에서 별은 어쩐지 심란하다. 첫째 수는 현실에서의 실존을 다루고, 둘째 수는 그 모습을 은유하고 있다. 좌절된 도시적 삶의 그림자를 처절하게 그려낸다. “라면 박스”로 대표되는 폐지, 일상적으로는 재활용품이라 불리는 것이지만 알맹이를 꺼내고 남은 빈 상자가 궁색하나마 누추한 몸을 의탁하는 공간으로 변신한다. “벌레처럼” 눈감은 자의 손에는 “때묻은 지난 날 명함”이 들려져 있단다. 권갑하 시인은 노골적인 표현, 적나라한 어휘들을 대담하게 구사하곤 한다. 인간의 모습을 처절하게 던져놓고는 짐짓 모른 척하며 “풀잎”과 “새”와 “별”을 이야기 한다. 세상은 그런 것이라고, 눈감지 않으면 지나칠 수 없는 오늘의 현실과 자꾸만 고개 돌려지는 추억 장이 있는가 하면 문득 고개 들어 하늘을 보면 순간 나를 위로할 것도 같고 내 심정을 알아주는 것도 같은 자연이 거기에 있다고. 측은지심을 자극하는 어휘들이 행을 막론하고 늘어서서 마음을 무겁게 가라앉힌다. 소리를 배제한 두 개의 장면이 오버랩 되면서 우리도 할 말을 잊는다, 그저 바라볼 뿐.
3.
권갑하 시인은 다양한 소재에 다양한 방법으로 접근하면서 지속적으로 형식의 변화를 꾀하는 데 주력한다. <마른 꽃다발>과 <별>이 비교적 유연한 호흡을 견지하며 시간을 지연시키려했다면 <괄호 속의 하루>나 <오존주의보 내리는 날>에서는 각박하고 답답한 심정을 다급하고 짧은 호흡으로 토해낸다.
워드프로세서 커서가 하릴없이 숨차다
튕겨지듯 집을 나선 나의 하루는
한 뼘 반 괄호 속에서 쓰고 다투고 돈을 센다.
강은 오늘도 녹조와 적조를 되풀이하고
그리운 사람은 내게서 너무 멀리 있다
오~랜 병 끝에 바라보는 한 폭 담채화처럼.
하루가 쓰레기통에 가득 쌓이는 저녁답
조금씩 흔들리는 것들이 아름답다.
서랍 속 꿈마저 짐 되는 괄호 속의 하루.
<괄호 속의 하루> 전문
오늘날의 우리는 문명의 이기를 맘껏 누리고 사는 듯하면서도 실은 그것들에 의해 구속당하고 소외당하며 살고 있다. “워드프로세서의 커서” 가 껌벅거리는 광경을 떠올려 보라. 언제까지라도 똑같은 자리에서 끝까지 그 속도와 강도를 유지하며 보채고 있다. 우리가 아무리 넌더리를 내도 아랑곳 않는다. 시인은 “하릴 없이 숨차다”고 넋두리한다. 우리는 때로 영원히 변하지 않은 것들을 갈구한다. 영원으로 가는 길을 찾으려 눈을 밝히기도 한다. 그러나 영원하다는 것은 지독하게 끔찍할 수 있다. 끝나지 않고 계속 반복된다면 행복이나 고통 같은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걸리버 여행기>는 죽지 않는 사람들이 나온다. 그것은 저주다. 죽지 않는다는 것처럼 처절한 절망이 또 있을까. 숨차게 껌벅이는 커서가 우리를 재촉하듯 세상 구석구석에는 우리를 상하게 하는 부유물들이 널려 있다. 하루하루를 괄호 쳐 보내면서도 또다시 새로운 하루에 부딪게 되듯, 시인은 한 수를 마치자마자 숨 돌릴 겨를도 없이 다음 수를 들이민다. 그러면서 “조금씩 흔들리는 것이 아름답다”는 뒤늦은 깨달음으로 완급을 조절한다. 치열하게 폭로하고 내던져버리기엔 시인이란 사람들의 품이 너무 너그러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요즘 아이들 책을 읽어보면 소위 반말 투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이렇습니다, 저렇습니다.”라는 표현이 아이들에겐 지나치게 고답적이라 여겨서인지 친근하게 옆에서 말하는 듯한 종결어미를 사용하곤 한다. 어쨌든 아이들은 집중한다. 구년묵이 우리들이야 뭔지 무시당하는 듯한 껄끄러움에 시큰둥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권갑하 시인은 <오존주의보 내리는 날>의 상황을 정중하게 묘사하고 있을 수 없어서 마치 친구에게 하듯 요란스럽게 반말로 운을 뗀다. 누구에게라도 가까운 사람이 되어 호소하고 싶은 의지의 반영이리라.
마셔도 갈증은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어
구토의 밤을 지샌 가로수는 뒤틀렸어
상현달 썩은 살점이 강 위로 녹아 내렸어.
폐수는 당당하게 수원지로 빨려들었어
절망의 은비늘들이 하늘로 튀어 올랐어
빛 잃은 반짝임만 오래 머리 위로 뿌려졌어.
울부짖었어 나뒹굴었어 알몸으로 타올랐어
아비규환 비명횡사 허공은 배가 터졌어
흐릿한 수족관 속은 텅~ 비어 있었어.
<오존주의보 내리는 날> 전문
빽빽한 글자만큼이나 가슴 답답한 어휘들이 소용돌이친다. “구토”, “썩은 살점”, “폐수”, “절망의 은비늘들”, “아비규환”, “비명횡사”...... 튀어나오는 문자들만으로도 넉넉히 참상을 짐작할 만하다. 게다가 시적 화자는 눈 맞추며 다가와 다짐을 한다. “뒤틀렸어”, “녹아 내렸어”, “빨려들었어”, “튀어 올랐어”, “울부짖었어”, “나뒹굴었어” “배가 터졌어”......아찔한 서술어들이 쉴 새 없이 줄기차게 쏟아져 나온다. 시인의 폐부로부터 끌어올려진 언어의 강도와 속도를 미루어 우리는 이 작품이 호소하는 진실을 온전히 받아들이게 된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아니 우리더러 어쩌라는 건지 시상이 절박하면 할수록 빨리 건너뛰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권갑하 시인의 작품 속에는 이 시대와 오늘의 현실을 은유하는 다수의 시편들이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시조의 외형적 이미지를 다양하게 표현하려는 시인의 의지에 힘입어 화려하게 부각되기도 한다. 시조에 대한 애끓는 사랑이리라. 사랑하면 책임지려 한다. 시조의 본 모습을 어떻게 지키고, 변신의 욕구는 또 어떻게 조절해야 할지 코디네이터에게 상의해 보면 좋을까? 역시 시인에게 부담지울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어쩐지 권갑하 시인의 이런 시구에 마음이 이끌린다.
하늘은 비어 있고 난 아직 길 위에 있다
몸을 비껴 길 밖의 길 아프게 부랑하던
시간의 잔주름 위를 쓸고 가는 바람소리.
<달 -서울역에서> 부분
눈도 시리지 않고 가락도 설지 않으며 고개마저 끄덕이게 되는, 진짜배기 같은 이런 작품에 슬그니 애착이 간다. 아마 시인도 알고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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